2026년 10월 27일 · @martin
행정복지센터 문화강좌 「실용인문학」 5강·6강 후기. 부제는 "행복한 일상을 위한 AI 활용법", 질문은 "AI는 나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갈까?"
26년 동안 PHP로 API를 만들어 온 개발자가 평일 오후 2시, 행정복지센터 강의실에 섰다. 청중은 개발자가 아니었다. 스마트폰으로 카톡은 하시지만 ChatGPT 앱은 처음 깔아 보는 분이 더 많은, 동네 어르신들이었다.
개발자 컨퍼런스에서는 "이 정도는 아시죠?"로 넘어가는 대목이 여기서는 강의 전체를 멈춰 세운다. 반대로 개발자 행사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을 질문이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 글은 그 두 가지, 무엇을 덜어냈는지와 무엇을 질문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강의안을 Claude와 함께 만든 과정은 [지난 글]에 따로 정리했다. 이번 글은 그 강의를 실제로 해 보고 나서 남은 것들이다.
강의는 이렇게 짰다
1교시 60분, 쉬는 시간 10분, 2교시 60분. 처음엔 100분짜리였는데 실습 시간이 모자라 늘렸다. 각 교시 끝에는 '인문학 나눔' 시간을 15분, 10분씩 따로 떼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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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시 |
다룬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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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
AI로 여행계획 만들기, 여행지 정보 검색(구글 렌즈), 여행 경비 계획, 인문학 나눔 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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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시 |
건강정보 활용, 이미지 생성 체험(ChatGPT), 추억앨범 만들기, 안전수칙, 인문학 나눔 ② |
주제를 '여행'으로 묶은 건 의도적이었다. 일정 짜기, 정보 찾기, 돈 계산, 사진 정리까지 AI를 쓸 일이 한 흐름 안에 다 들어 있다. 기능을 따로따로 가르치는 것보다 "제주도 2박 3일"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는 편이 훨씬 잘 남는다.
안전수칙도 손봤다. 예전에는 "자녀에게 다른 번호로 전화해 확인하세요"였는데, AI가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지금은 "가족끼리 암호를 미리 정해 두세요"가 더 현실적이다. 이 대목에서 메모하시는 분이 가장 많았다.
복붙을 없앤 이유
이번 강의에서 가장 크게 바꾼 건 마지막 실습, 추억앨범 만들기였다.
처음 계획은 이랬다. 여행 사진을 ChatGPT에 올려 제목과 사진별 한 줄 설명을 받고, 그 문장을 복사해서 사진 앱 앨범 설명에 붙여 넣는다. 개발자 눈에는 3분짜리 작업이다.

그런데 수강생 자리에 앉아 순서를 다시 세어 보니 문제가 보였다. 문장을 길게 눌러 복사하기, 앱 전환, 붙여 넣을 칸 찾기, 이걸 사진마다 반복하기. 이 중 하나만 막혀도 그분의 실습은 거기서 끝난다. 옆자리 분이 도와드리는 사이 강의는 진도를 나가고, 그분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개발자는 이런 걸 '사소한 UX 마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초보자에게 마찰은 사소하지 않다. 복붙 한 번이 곧 이탈 지점이다.
그래서 방식을 바꿨다. 사진 2~3장을 첨부하고 한 문장으로 요청한다.
"이 사진들을 예쁘게 배치하고, 사진마다 어울리는 한 줄 설명을 넣어서, 인쇄할 수 있는 A4 한 장짜리 PDF로 만들어줘"
앱을 떠날 일이 없다. 결과는 파일 하나로 나오고, 다운로드해서 그대로 인쇄하면 된다. 몇 장 모아 두면 종이 사진첩이 된다.
이 결정의 기준은 두 가지였다.
- 단계를 줄인다. 실습 단계 수가 곧 낙오자 수다. 6단계를 3단계로 줄이면 따라오는 사람이 늘어난다.
- 결과물이 손에 남게 한다. "오늘 이걸 만들었다"고 들고 갈 수 있는 게 있어야 집에 가서 다시 해 본다. 화면 속 문장은 쉽게 사라지지만 종이 한 장은 냉장고에 붙는다.
돌아보면 API 설계할 때와 같은 원칙이다. 클라이언트가 두 번 호출하고 응답을 조립하게 만들지 말고, 필요한 걸 한 번에 완성된 형태로 돌려준다. 사용자가 개발자든 어르신이든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대비는 해 뒀다. PDF 생성은 기기와 앱 버전에 따라 결과가 조금씩 다를 수 있어서, 안 되는 경우엔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 인쇄하는 방법을 바로 안내할 수 있게 준비했다. [현장에서 PDF 생성이 잘 됐는지, 대체 방법을 쓴 분이 있었는지 적기]
"인문학 나눔" 시간에 나온 질문들
이 강의의 이름은 '실용인문학'이다. 사용법만 가르치면 그냥 스마트폰 교실이 된다. 그래서 각 교시 끝에 슬라이드 한 장을 따로 두고, 짧은 문장 하나와 질문 두 개를 띄웠다.
1교시 끝 — 여행을 AI가 다 짜 준다면
좋은 지도를 가진 사람도, 결국 그 길을 걷는 건 자기 자신입니다.
- "AI가 계획을 다 짜준다면,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할까요?"
- "내가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2교시 끝 — 정보, 그림, 사진을 남기는 이유
몸을 돌보는 지혜도, 상상하는 마음도,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결국 AI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 "오늘 배운 것 중 가장 먼저 써보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이 질문들은 개발자 행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개발자는 "이걸로 뭘 만들 수 있나"를 묻는다. 이 강의실에서는 "이걸 쓰면 내 하루가 어떻게 달라지나"를 묻는다. 같은 도구를 두고 완전히 다른 질문이 나온다는 것, 그게 이 강의를 하며 가장 크게 배운 점이다.
건강정보 파트에서도 같은 태도를 지켰다. AI가 알려 주는 건 참고 정보이고, 최종 판단은 나와 의료진의 몫이라는 점을 반복했다. 겁을 주는 문장 대신 "이렇게 물어보면 더 잘 알려 줘요"라는 문장을 썼다.
개발자가 강의실에서 배운 것
하나, 초보자에게 '한 단계'는 생각보다 무겁다. 개발자에게 앱 전환은 0.5초짜리 동작이지만, 처음 쓰는 사람에게는 길을 잃는 지점이다. 실습을 설계할 때 기능보다 단계 수를 먼저 셌다.
둘, 결과물이 남아야 배움이 남는다. 화면 속 문장보다 손에 쥔 A4 한 장이 집에 가서 다시 해 보게 만든다. 강의의 끝은 '이해했다'가 아니라 '만들었다'여야 한다.
셋,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도 '왜'를 물어야 한다. 인문학 나눔 시간은 원래 수강생을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건 나였다. 매일 AI로 코드를 짜면서 "이걸 쓰면 내 하루가 어떻게 달라지나"를 물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강의 슬라이드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AI는 준비를 돕고, 선택과 경험은 우리 몫입니다.
여행 계획을 AI가 짜 줘도 그 길을 걷는 건 나다. 앨범을 AI가 만들어 줘도 그 사진을 찍은 날을 기억하는 건 나다. 26년 동안 시스템을 만들어 왔지만, 이 문장을 가장 실감한 건 행정복지센터의 평일 오후 2시였다.
다음에 비슷한 강의를 준비하는 분께: 실습 순서를 수강생 자리에서 한 번만 직접 따라 해 보시길. 복붙 한 번이 보이면, 그게 바로 덜어낼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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