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나.. 언젠가는..

나는 느리다. 말도 느린 편이고, 걸음도 느리고, 밥먹을 때도 느리고,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도 느리다.
정해놓은 시간도 힘들어하는 편이다. 좀 빠를 수도 있고 좀 늦을 수도 있고..
하지만,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더라도 가다가 쉬어도 하고 싶고 하려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잊지않으려한다. 단지 시작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많이 늦을 뿐이다.
그리고 잊고 있다가도 어느순간 무의식에서부터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낀다.

천천히 가기도 하고, 안가기도 하고, 가다가 쉬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가기도 하고..
아마도 그림이 나에게 그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어제 한주를 쉰 후 다시 화실을 찾았다. 겨우 한주 쉬었을뿐인데 정말 오랜만에 간 것처럼 어색함이 느껴졌다.
이젤 앞에 앉았으나 손이 또 말을 안들었다. 아침에 이름이 기억안나 그렇게 찾아헤메던 철학자 볼테르석고상을 또 째려봐야하는 상황이..^^;;
그럴 때 나를 위로해주는 공간이 있으니 내 자리를 좀 멀리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빨간 쿠션이 눈에 띄는 공중부양 흔들의자(?)이다 ㅎㅎ 아마도 그 자리를 제일 많이 애용하는 사람이 나일 것이다.

어제 화실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얘기를 들었건만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야속하다.
하지만 기억을 생생히 해서 그 내용들을 모두 적어놓을 수는 없다해도 아련하게 나의 생각속으로 몸속으로 습득된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들은 쉬이 잊혀질 것 같지않다.

한우물을 파지 못한 것 같으나 한우물을 판 그림에 대한 오랜 세월들이 어제 나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림이 좋아서 그 끈을 잡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은 나에게 그 소중함을 그렇게 녹녹하게 허락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림에만 빠져있기에는 삶이 내게 그리 너그럽지 못했다. 할 만하면 쉬어야 하고 쉬다보면 다시 하고싶어지고 이런 시간들이 흐르면서 난 너무도 다양한 곳에 관심을 가졌고 호기심도 많아 한번씩은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하고 싶은 걸 못하니 대리만족이었을거란 생각도 든다. 뭐 어쨌든, 지금의 나에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하나하나 꺼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힘이 되는 큰 재산들이다. 어찌보면 산만해보이지만 그것들이 언젠가는 내 그림에 하나로 모아질 날이 올거라는 쌤의 말처럼 설레이는 희망을 가져본다.

언젠가 예전에 내가 그렸던 그림들이 창피한 순간이 있었다. 좋은 그림들 잘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눈이 높아져서인지 예전의 나의 그림을 보면 미숙한 부분이 보이고 저기는 왜 저렇게 했을까하는 조금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곤했다. 그런데 어느순간 생각들이 바뀌었다. 저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비록 지금 역시 미숙하지만 저 그림들이 나의 순수했던 시절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미숙한 유물로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그 시절의 추억을 안겨주고 소중함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생각속에서 끊임없이 해답을 찾으려는 나에게 그냥 아무생각없이 그리는 순간을 즐기면 될터인데 뭐가 그리 진지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다시 시작한 그림이 내게 주는 의미는… 그림을 그릴때의 소중함을 다시 알았다는 것, 쉽게 포기하고싶지 않다는 것, 어설프더라도 그림속에 나의 진심이 담겨있기를 바라는 것, 나와 더불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것.. 이러한 이유들이 있기에 과하지않은 진지함은 약이 될거라 믿고싶다.

여전히 난 석고상 소묘를 고집하고 있다. 입시를 할 것도 아닌데 …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지금은 볼테르..
아그리파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줄리앙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게 나를 갈등하게 하고 힘들게 했던 비너스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볼테르에서 헤메고 있다.
“왜 힘들어하면서 석고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면
“그럼 그만하고 다른 거 하실래요?” 하는 쌤의 돌직구에 난 잠시 머뭇하다가 아니라고 더 해보고 싶다고 자신없는 대답을 하곤한다.
한풀 꺽인 내게 지난번 비너스를 그릴 때 해주셨던 얘기들을 다시 한번 풀어주셨다. 취미에서 이 과정을 해내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응원을 해주신다. 고맙게도 쌤은 설명했던 내용들을 잊으면 내게 백번이고 반복해서 얘기해줄 수 있다고 걱정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나는 화실을 가서 이제 석고는 그만하고 싶다고 목청 높여 외칠지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이순간의 그림에 진심을 담고싶다.
문득, 지난 시간 쌤이 해주었던 잊고있던 얘기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떠올리다보니, 단순히 연필을 이용해 형태를 잡고 명암을 표현하고 세련된 선과 면을 표현하기위한 작업이 아니라 온전히 내 앞에 놓인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다시 차오른다. 앞에 놓인 사물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나가고 공간을 채우기도 비우기도 하는지, 내가 그림에서 원하는게 무엇인지 더 깊게 알고 싶어졌다. 최소한 석고상과 정물들을 그리고 있을동안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자극을 주고 노력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것은 허당끼 풀풀 풍기면서 그림에 있어서만큼은 왜 이리 단순하지 못한지..^^;;

긴 시간 아주 느리게 느리게 여기까지 돌와 왔듯이 그 동안의 경험들이 나에게 적지않은 내공이라는 걸로 위로하고 있듯이 앞으로도 나는 아주 느리게 느리게 나를 비워가면서 채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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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와 대치중인 볼테르석고상^^

석고상 ‘비너스’

아그리파-줄리앙-비너스
몸이 안좋아서 자주 화실을 못가다보니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걸리기도 했지만, 막막함이 밀려오기도 했던 비너스..
사실은 비너스를 하면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을까하는 후회도 들었고, 지금의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인가 자책도 많이 했다.
보통은 내가 그림과 씨름을 하든 대상과 그림을 번갈아가며 노려보고 있든 sos를 할 때까지 멀리서 묵묵히 기다려주시는 편인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마무리를 해야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sos를 보냈던 비너스.
내 이름을 써넣기가 한없이 부끄러웠던.. 그래서 이 그림은 쌤의 손길이 많이 들어갔는데 내 이름을 써넣어도 되는 거냐고 난처한 질문도 하고..
그러다보니 한곳만 열심히 파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ㅠ 쌤은 그런 나에게 틈틈이 다른 곳도 하라고 주문을 하시고.. 아마도 나의 안식처 흔들의자를 가장 많이 찾지 않았나 싶다.

엉망으로 그려내도 내 손에 더 많이 의지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나에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답답함에 손을 놔버리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난 지금 처음부터 시작하고 배우는 입장으로 겸손해야한다는 것과 부분을 보지말고 전체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빛의 흐름을 알고 싶었고, 어둠의 흐름도 알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묘사를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전체의 흐름과 조화를 봐야한다는 것을..
그림을 좀 할 줄 알면 세부묘사를 해서 입체감을 내고 완성을 하는 것은 누구든지 연습만 시키면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전체를 보면서 공간을 생각하고 채워줄 곳은 채우고 과감하게 비워야할 곳은 비우면서 주변의 물체와의 조화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쌤의 말이 가슴에 콕 박히는 날이었다.
아마도 그림과 함께한 오랜 시간들로 인해 나를 좀 우쭐하게 생각한 탓이리라.
이 과정들이 지나면 언젠가는 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때가 곧 올거라고 쌤이 강하게 부드럽게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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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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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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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2)

비너스4
(2016.11.25)

석고상 ‘줄리앙’

줄리앙 석고상은 예전의 기억도 있고 낯설지 않다.
바라볼 때 거리감이 없다고 하면 아그리파에 비해 좀 수월하려나..
아이 방학도 있고, 화실을 자주 빠지다보니 완성하는데도 꽤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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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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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14)

줄리앙
(2016.9.2)

두번째 도전! 석고상 ‘아그리파’

이번주는 화실을 두번 갔다.
좀 피곤한 감도 있었지만, 뭔가 했다는 뿌듯함도 있다.
지금은 입시에서도 석고가 빠져있지만, 미대를 준비하는 학생이 아니라 단순 그림을 좋아 덤벼드는 취미생에게는 한편으론 벅차지만, 한편으론 부담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하면 할수록 연필은 내 스타일이야 이런 생각도 겁없이 든다.
여전히 갈 길이 멀어 헤메지만 처음 대할 때의 막막함은 없어져 다행이다.
천천히 한계단 한계단.
새롭게^^

드디어 새 연필을 받았다.
4B몽땅 연필이 몇개가 모여질까…?
저 짧아진 연필을 보고 있으니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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